0114 — 영원회귀 - 니체 - 앤디 워홀 넘어서기 (보드리야르 넘어서기)

일자별 메모 (0114).
영원회귀 - 니체 - 앤디 워홀 넘어서기 (보드리야르 넘어서기)

결국에 이것은 영원 회귀, 니체적인 긍정에 대한 얘기이다.
계속해서 변증적으로 (기호학적 연쇄작용 적으로) 고차원으로 올라가도, 거기서 또 막힐/먹힐 수 있다 (예: AI가 따라올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적분을 해서, 더욱 고차원으로 올라가야 할 것이다. (-이즘-이즘-이즘, 제프리 웨스트: 스케일 가속함수)

모두가 이 적분-적분-적분, 이즘-이즘-이즘, 상위차원-상위차원-상위차원의 링 위에 올라올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링 위에 올라온 자가 있다면, Welcome, 그대는 더욱 고상한 (존재하지 않는/감각할 수 없는 - 그러나 추구되어서야 마땅할) 진리를 찾아 - 무엇보다 그 진리를 향한 과정 자체를 유희하는, 삶을 놀이로써 볼 수 있는 <적분하는 아이> 이고, 그렇기에 아랫 사람 (낮은 차원에 있는 사람)에게 신으로 빚추워질 (혹은 마녀로 추방당할, Noise로 무시당할) 자격이 충분하다.

이 과정을 긍정하자. Amor Fati. 긍정적으로 <적분하는 아이> 가 되자.

이 메타적 차원, 이즘-이즘-이즘으로 향해라.
남이 만들어놓은, 짠호은 판 (반포자이즘, 시스템, 게임)의 규칙을 따르지 말고
내가 나서서 게임의 규칙을 바꾸고, 재설정하자.

이 (새로운) 게임의 규칙이 질렸을때는,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혹은 AI가) 이 규칙 만들기를 파생적으로 (최소한계차이-워홀-보드리야르-후기자본주의 적으로) 만들어내어 모방할 때에는, 게임의 (게임의 규칙)의 규칙을 만들자. 즉, 다시 적분하자. 또 한단계의 적분을 하여 그들을 따돌리라.
이렇게 해서 그대는 더 높은 차원에 이르며, 긍정하는 적분의 아이가 된다.

결국 <반포자이즘>은 게임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직접 게임의 규칙을 설계해라. 는 메시지를 준다.
게임의 규칙을, 더더욱 규칙의 규칙을 설계 해라. 나중에는 게임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기존의 2차원적 게임의 시각에서는) 무질서로 읽혀질 정도로! (아, 무지라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멍청한 것인가)

실로 내가 <게임 이론>을 혐오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왜 게임의 고정된 규칙을, Unquestionable Assumption을 강조하는가? 고정불변의 진리는 없다, 허물어야될 낡은 이분법/가치평가만 있을 뿐. 게임의 고정된 규칙은 타자, 니체가 말한 기존의 진리-이분법. 낡아 빠진. 이보다 더 고창원으로 가면 그 게임의 규칙, 반포자이즘의 규칙을 너무나도 쉽게 바꿀 수 있다. 적분에 대한 발상, 탐험에 대한 용기, 비효율의 받아들임이 힘든것 뿐이지.
<게임 이론>은 죽었다. 게임 이론의 적분을 통한 게임 이론의 부정, 나중에는 적분의 적분의 적분을 통한 게임 이론 신봉자로부터의 비야냥 (그러나 더욱 고차원의 진리) 만이 추구될 수 있을 뿐이다.

3차원에서 형태를 주는 것은 2차원에서 혼돈이고, 더 높은 차원에서의 생성은 낮은 차원에서 파괴로 인지될 수 있다.
게임의 규칙을 따르지 말아라. 높은 차원에서 게임을 바라봐, 게임의 규칙을 바꿔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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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회귀 - 니체 - 앤디 워홀 넘어서기 (보드리야르 넘어서기)

결국에 이것은 영원 회귀, 니체적인 긍정에 대한 얘기이다.
계속해서 변증적으로 (기호학적 연쇄작용 적으로) 고차원으로 올라가도, 거기서 또 막힐/먹힐 수 있다 (예: AI가 따라올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적분을 해서, 더욱 고차원으로 올라가야 할 것이다. (-이즘-이즘-이즘, 제프리 웨스트: 스케일 가속함수)

모두가 이 적분-적분-적분, 이즘-이즘-이즘, 상위차원-상위차원-상위차원의 링 위에 올라올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링 위에 올라온 자가 있다면, Welcome, 그대는 더욱 고상한 (존재하지 않는/감각할 수 없는 - 그러나 추구되어서야 마땅할) 진리를 찾아 - 무엇보다 그 진리를 향한 과정 자체를 유희하는, 삶을 놀이로써 볼 수 있는 <적분하는 아이> 이고, 그렇기에 아랫 사람 (낮은 차원에 있는 사람)에게 신으로 빚추워질 (혹은 마녀로 추방당할, Noise로 무시당할) 자격이 충분하다.

이 과정을 긍정하자. Amor Fati. 긍정적으로 <적분하는 아이> 가 되자.

이 메타적 차원, 이즘-이즘-이즘으로 향해라.
남이 만들어놓은, 짠호은 판 (반포자이즘, 시스템, 게임)의 규칙을 따르지 말고
내가 나서서 게임의 규칙을 바꾸고, 재설정하자.

이 (새로운) 게임의 규칙이 질렸을때는,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혹은 AI가) 이 규칙 만들기를 파생적으로 (최소한계차이-워홀-보드리야르-후기자본주의 적으로) 만들어내어 모방할 때에는, 게임의 (게임의 규칙)의 규칙을 만들자. 즉, 다시 적분하자. 또 한단계의 적분을 하여 그들을 따돌리라.
이렇게 해서 그대는 더 높은 차원에 이르며, 긍정하는 적분의 아이가 된다.

결국 <반포자이즘>은 게임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직접 게임의 규칙을 설계해라. 는 메시지를 준다.
게임의 규칙을, 더더욱 규칙의 규칙을 설계 해라. 나중에는 게임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기존의 2차원적 게임의 시각에서는) 무질서로 읽혀질 정도로! (아, 무지라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멍청한 것인가)

실로 내가 <게임 이론>을 혐오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왜 게임의 고정된 규칙을, Unquestionable Assumption을 강조하는가? 고정불변의 진리는 없다, 허물어야될 낡은 이분법/가치평가만 있을 뿐. 게임의 고정된 규칙은 타자, 니체가 말한 기존의 진리-이분법. 낡아 빠진. 이보다 더 고창원으로 가면 그 게임의 규칙, 반포자이즘의 규칙을 너무나도 쉽게 바꿀 수 있다. 적분에 대한 발상, 탐험에 대한 용기, 비효율의 받아들임이 힘든것 뿐이지.
<게임 이론>은 죽었다. 게임 이론의 적분을 통한 게임 이론의 부정, 나중에는 적분의 적분의 적분을 통한 게임 이론 신봉자로부터의 비야냥 (그러나 더욱 고차원의 진리) 만이 추구될 수 있을 뿐이다.

3차원에서 형태를 주는 것은 2차원에서 혼돈이고, 더 높은 차원에서의 생성은 낮은 차원에서 파괴로 인지될 수 있다.
게임의 규칙을 따르지 말아라. 높은 차원에서 게임을 바라봐, 게임의 규칙을 바꿔버려라.